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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초대 황제 소열제 유비
刘备 | Liu Bei
파일:Liu Bei.jpg
본명유비(劉備)
현덕(玄德)
생몰년도161년 ~ 223년 6월 10일 (향년 61세)
출신지유주 탁군 탁현 누상리
중국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시
재위기간221년 5월 15일 ~ 223년 6월 10일(1)

무릇 큰 일을 하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차마 이들을 버리고 가겠는가!
조조군에 쫓겨 피난을 가던 중, 백성들을 버리고 가자는 측근들의 진언에 답하며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

황족인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황실의 피가 섞였다는 점 때문에 유황숙이라고도 불린다.(2)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 시작해 중국 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목차

1.
2. 특징 및 평가
2.1. 처세술과 잦은 의탁
2.2. 인물상과 백성을 향한 마음
3. 트리비아
4. 영상

1.

유주 탁군 탁현 누상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을 삼고 돗자리를 짜서 파는 돗자리 장수 노릇을 하며 근근이 먹고살았다. 당시 유비의 집 앞에는 수레의 덮개 모양을 한 거대한 뽕나무가 있었는데, 어린 유비가 "나는 자라서 반드시 저런 모양의 덮개를 씌운 수레(황제의 수레)를 탈 것이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싹수부터 남달랐던 역적 혹은 대기만성형 인재

이후 184년,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자 동향의 호걸이었던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의병을 일으켜 세상에 나선다.(3) 그러나 기반이 전혀 없었던 유비는 수십 년간 중국 전역을 떠돌며 숱한 패배와 도주를 반복해야 했다. 나이 50이 다 되도록 제대로 된 영지가 없어 남의 밑을 전전하던 그는, 제갈량을 삼고초려로 영입하고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꺾으며 마침내 형주와 익주를 차지해 자기만의 기반을 다진다. 이후 221년, 조조의 아들 조비가 후한의 헌제를 몰아내고 위나라를 세우자, 한나라의 명맥을 잇는다는 명분 하에 황제에 즉위하여 촉한을 건국한다.

2. 특징 및 평가

2.1. 처세술과 잦은 의탁

초반에 세력이 없었던 유비는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군벌들에게 의탁했다가 떠나기를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공손찬, 도겸, 여포, 조조, 원소, 유표 등 당대의 굵직한 제후들 밑을 한 번씩 다 거쳐갔다.

특히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통수를 치고 독립하는 패턴을 자주 보였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배신자 혹은 처세술의 달인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여포에게 통수를 맞고 조조에게 도망쳤다가, 조조의 명으로 원술을 토벌하러 나가서는 그대로 조조를 배신하고 원소에게 붙는 등, 이적의 행보만 보면 어지간한 철새 정치인 뺨치는 수준이다. 다만 당시 난세의 시대상과 밑바닥 출신이라는 유비의 한계상, 살아남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2.2. 인물상과 백성을 향한 마음

잦은 배신과 도주에도 불구하고 유비가 당대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끝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무기는 바로 경이로운 수준의 인덕과 카리스마였다.

똑같이 스스로 황제를 칭했던 원술과 비교해 보면 유비의 진가가 드러난다. 똑같이 황제인데 왜 원술과는 평판이 다른가? 하면 원술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꿀물을 들이켜며 사치를 부렸고, 백성들의 식량을 약탈하며 혹독하게 착취하여 사람들의 원성을 샀다. 반면 유비는 언제나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펼쳤다. 조조군에게 쫓겨 형주에서 도망칠 때, 무려 10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유비를 따라나섰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도망치는 입장에서는 짐이 될 수밖에 없는 백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데려가려 한 대목에서 그의 진정한 인성을 엿볼 수 있다.

3. 트리비아

팔이 무릎에 닿을 정도로 길고, 귀가 어깨에 닿을 정도로 컸다는 묘사가 있다. 정사 기록은 아니고 연의의 과장(4)이지만, 그만큼 비범한 외모를 가졌음을 의미하는 장치로 쓰인다.

연의에서는 눈물이 매우 많은 것으로 묘사된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울고 본다는 이미지가 강한데, 이는 삼국지연의가 유비를 나약하지만 착한 군주로 묘사하며 생긴 오해에 가깝다. 실제 정사에서의 유비는 밑바닥부터 칼부림을 하며 올라온 산전수전 다 겪은 협객이자 뼛속까지 무골이었다.

4. 영상

(1) 촉한의 황제로서의 재위 기간이며, 한중왕 시절이나 서주목 시절 등을 합치면 군주로서의 경력은 더 길다. 황제 재위 자체는 고작 2년 남짓이었다.
(2) 다만 중산정왕 자체가 아들만 120명이 넘었던 데다, 유비 대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평민이나 다름없는 몰락 귀족이었다.
(3) 삼국지연의에서는 이 사건을 그 유명한 도원결의로 묘사한다. 정사에서는 복숭아밭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이들이 은혜가 형제와 같았고 같은 침상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사실상 도원결의나 다름없는 끈끈한 사이였던 것은 맞다.
(4) 정사에서도 팔과 귀가 길고 크다는 내용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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