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安重根 / An Jung-geun,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안중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민족주의자다. 본관은 순흥 안씨, 참판공파 30세, 29세 태훈의 장남. 종교는 가톨릭.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호는 토마스의 한역인 도마. 아시아 국가들이 힘을 합쳐 신문명으로 무장한 서양을 견제해야한다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였다. 이른바 동양평화론의 제창자이기도 하다.
대한의군 의병 참모중장으로 1909년에 일본 4대 총리대신이자 전 조선 통감,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주도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이후 체포되어 사형으로 순국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안중근에게 건국훈장을 주었다.
전형적인 무골이였다. 글을 어렸을 때 빨리 떼 신동 소리 좀 들었는데 나중에 공부는 손 놓고 사격과 사냥, 무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을 응해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적에는 안응칠(安應七)이라 불렸는데, 나중에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은 뒤에도 자를 응칠이라 썼다.
한국이 일본에 의해 국권이 피탈되었다는 것을 알게된 안중근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삼흥학교, 돈의학교 등 학교를 설립하고 인수해 민족교육에 힘쓴다. 국채보상운동으로 황해도에서 끗발 좀 날렸는데 국채보상운동이 일본의 방해로 실패한다. 또, 고종이 헤이그 특사 실패로 일본에 의해 폐위되었다는 소릴 듣고 분노하여 연해주로 달려가서 그 무골기질로 의병을 이끈다. 자신이 무인이자 군인이라는 정신이 꽤 깊었던 모양인지, 군법과 인도적인 뜻에서 일본군 포로를 풀어주었다가 포로의 발설로 기습을 당해 처참히 패한다. 그 후 의군에서 쫓겨났다가 다시 뜻을 같이한 11명의 군인들과 함께 1909년 손가락을 자르고 결사대를 세운다. 이것이 바로 단지동맹(斷指同盟)이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콥초프와 회담을 위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안 안중근과 우덕순, 조도선 등 동지들은 하얼빈역으로 향한다. 하얼빈역에서 암살할 것을 계획했으나 삼엄한 경계로 실패했다. 그러나 경호가 허술한 촌극의 순간을 안중근은 놓치지 않고 FN M1900 권총으로 순식간에 3발을 발사, 3발 다 맞았고 2발을 이토의 복부에 명중시킨다. 그 순간에 같이있던 비서관과 만철 이사, 하얼빈 총영사를 저격한다.(1) 신기에 가깝다. 수행을 마친 후 러시아말로 꼬레야 우라(한국 만세!) 라고 두번 외치고 러시아 헌병에 의해 체포당한다. 일본 관할인 뤼순 감옥으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3월 26일 오전 10시에 집행되어 순국한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자신이 이토를 죽인 이유를 15가지를 댄다. 이걸로 단지 일본에 대한 테러리즘이 아니라 악덕한 조선 통감이자 전 총리 이토를 처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도 재판 중 교전 중에 군인으로써 이토를 처단한 것이기 때문에 군법으로 다루라고 했다. 사실 무장하지 않은 사람을 무장한 군인이 죽이는 것은 불명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단순한 민간인이 아니라 제국주의 침략의 수괴였으므로, 안중근은 이를 전쟁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아래는 그 15가지 안중근이 이토를 죽인 이유.
1. 한국의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2.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3. 조약과 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4. 무고한 한국인들을 학살한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 철도, 광산, 산림, 천택을 강제로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군대를 해산시킨 죄 9. 교육을 방해한 죄 10.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킨 죄 11.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2.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 현재 한국과 일본 사이에 경쟁이 쉬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태평 무사한 것처럼 위로 천황을 속인 죄 14.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5. 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황제를 죽인 죄
15번 항목을 보듯, 안중근은 단지 피지배 국민으로서 일본을 대상으로 자행한 테러가 아니라, 이토가 천황의 아버지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했으며 그 힘을 동양평화에 올바르게 쓰지 못하고 무력으로 같은 아시아 국가들을 침략하고 있기에 총으로 죽였다고 설명한다. 이는 일본 법정의 논리를 역이용하여 일본 내부의 모순을 찌른 고도의 심리전이기도 했다.
일본은 그들의 문화(야쿠자가 약지를 자르는)와 관련지어 안중근을 야만스러운 테러리스트로 만들기 시작했다. 다들 알다시피 안중근의 단지는 처절한 구국의 결단이지, 암살자가 암살을 실행하기 전 치르는 조선인들의 풍습 따위가 아니다. 일본 내각은 일본의 황색언론 엽서 등으로 안중근의 손가락 잘린 손을 강조하는 사진을 퍼뜨린다. 자신들의 조선 침탈의 정당성과 더불어 그들의 내각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프로파간다로 쓰려고 한 것이다. 근데 이 사진이 나름 멋있어서(2) 그의 사진이 일본을 포함해 조선과 만주에 퍼져 멋진 의인이 되게 되었다. 안중근의 아들을 시켜 안중근 대신 사과를 시키고 이토와 안중근의 위패가 함께 있는 신사에 분향과 참배까지 시켜 안씨 일가에 대굴욕을 준다. 백범 김구는 이 소식을 듣고 격노하여 민족 반역자 안준생을 처단해달라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14살 때 집안이 가진 사병들을 동원해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했었다고 한다. 이 때 가족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동학농민운동 말기에는 혼란한 정국을 틈타 각종 약탈과 방화, 강간 등이 창궐하고 있었다. 안중근은 이들을 진압한 것이다. 또한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유학자적 배경에서 동학의 종교적 색채에 거부감이 있었고, 지역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측면이 강했다.
한국 가톨릭은 아직도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복권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1993년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행한 살인은 정당방위이며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공식 언급하며 복권의 물꼬를 텄고, 2011년에는 한국 가톨릭교회 차원에서 안중근 의사 추모 미사를 공식 거행함으로써 사실상 완전히 복권되었다. 당시 서울대교구장이었던 뮈텔 주교의 친일 행적과 성사 거부 사건은 가톨릭의 뼈아픈 과거사로 남아 반성되고 있다.
친일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친일파가 일본 총리를 총으로 저격하고 만주 감옥에 갇혀 사형당하는 일이 있는가? 그의 옥중저서 동양평화론에서는 동양평화를 위해 러시아와 싸운 일본을 칭찬한다. 그리고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같은 아시아 국가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탈 행각을 비판했다. 즉, 안중근이 말한 일본은 동양의 동반자로서의 일본이지, 침략자로서의 일제가 아니었다.
위 이토를 죽인 이유를 보듯, 안중근은 동양주의적인 사람이다. 그의 옥중 저서 동양평화론의 내용은 러일전쟁을 백인과 황인의 대결로 보고 일본의 승리를 축하하지만, 일본이 갖게 된 위세를 동양 공존을 위해 쓰지 않고 같은 황인들을 지배하고 빼앗고 핍박하기를 일삼는 것에 개탄하고 있다. 그는 한중일 3국이 공동 의회를 구성하고, 공동 화폐를 발행하며, 공동 방어군을 창설하자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시아 연합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참고로 이 양반은 여기서 백인들 중 가장 악질인 나라를 러시아라고 하고 있다. 한국이랑 가까우면서 당장 청을 위협하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겠지만.(3)
인터넷 언론은 솔로부대들이 발렌타인 데이를 안중근이 사형선고를 받은 날로써 경건히 기려야 한다며 커플지옥을 외치던 개그를 진지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실제로 2월 14일은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은 날이 맞다. 그러나 이 날은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한 날도 아니고, 사형이 집행된 3월 26일도 아니다. 그냥 법정 일정상 그 날 사형을 선고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