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상가 중 한 명이며, 20세기의 절반을 지배했던 이념 전쟁의 원인 제공자이다.
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며 과학적 사회주의를 제창했다.
1818년 트리어에서 변호사였던 아버지와 네덜란드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유대인이었으나 당시 프로이센의 유대인 차별 정책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트리어 고등학교를 거쳐 1835년 베를린 대학교 법학부에 진학하였고, 1841년 박사 학위를 받았다.
(2) 그러나 법학보단 철학, 역사에 심취했고, 헤겔파들과 어울렸다. 졸업 후 학자의 길을 걷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아 기자로 발을 돌려 라인신문에서 일했으며, 주필까지 올랐으나 정치적 문제로 1년 만에 폐간되었다. 이때부터 프로이센 당국의 요주의 인물로 찍혀 평생을 쫓기는 신세가 됐다.
1843년 예니 폰 베스트팔렌과 결혼하였고, 독일을 떠나 프랑스 파리로 갔다. 예니는 귀족 출신이었고 집안의 반대도 있었으나 두 사람의 마음이 더 강하여 결혼은 강행됐다. 그리고 파리에서 평생의 동반자가 되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만났다. 방직 공장주의 아들이었던 엥겔스는 부유했는데, 평생 동안 마르크스의 물주(...)이자 후원자, 친구, 동료가 되어주었다.
마르크스가 굶어 죽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8할이 엥겔스 덕분이다.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를 쓰고 신성가족, 독일 이데올로기 등을 엥겔스와 공동 집필하였다. 그러나 파리에서도 정치적 문제로 추방되었고, 벨기에 브뤼셀로 떠나 철학의 빈곤를 썼다. 그리고 1848년, 공산당 선언을 출판하였다.
이후 파리를 거쳐 독일에서 라인신문을 잇는 신라인신문을 발행했으나, 이 또한 탄압을 받아 폐간되었다. 독일을 떠난 마르크스는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으로 망명했는데, 그곳이 마지막 종착지였다. 마르크스의 런던에서의 삶은 비참할 정도로 가난했는데, 자녀 중 여럿이 영양실조와 병으로 일찍 사망했을 정도다. 가난 속에서도 대영도서관을 자주 방문하며 기사를 작성했다.
영국에서 자본론 등을 출판하며 활동하던 마르크스는 점점 건강이 악화되었다. 애연가에 애주가, 불규칙한 생활… 특히 엉덩이 종기
(3) 때문에 앉아 있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결국 1881년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2년 뒤인 1883년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에는 엥겔스를 포함해 겨우 11명만이 참석했을 정도로 쓸쓸했다. 그는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혔다.
이름 표기가 칼 마르크스, 칼 맑스, 카를 맑스 등으로 다양한 편이다. 독일어 발음은 카를에 가깝고, 칼은 영어식이다. 마극사(馬克思)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중국식 음차 표기다.
일간에는 그가 사탄 숭배자였다는 설이 돌기도 한다.
# 그가 쓴 희곡 Oulanem이나 몇몇 시의 어두운 내용으로 생긴 음모론으로 보인다. 무신론자이고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말한 게 마르크스였다.
악필로 유명하다.
주식 투자를 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