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스카이
袁世凱(1) | Yuan Shikai
외부:https://pbs.twimg.com/media/EGrC9yhVUAIbfms.jpg
출생1859년 9월 16일
청나라 허난성 샹청현
사망1916년 6월 6일 (향년 56세)
중화민국 베이징시
국적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제국 → 중화민국
위정(慰亭)
용암(容庵)
주요 직책조선 주재 교섭통상대신 (1885 ~ 1894)
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1912 ~ 1913)
중화민국 제1대 대총통 (1913 ~ 1915, 1916)
중화제국 황제 (1915 ~ 1916)

중국의 정치인. 중화제국의 황제이기도 했다.

신해혁명 당시 청나라 조정을 배신하고 쑨원과 타협하여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 자리에 올랐으나, 민주 공화제를 짓밟고 중화제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홍헌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전국적인 반발에 부딪혀 불과 몇 달 만에 제정을 취소하고 화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중국은 각지의 군벌들이 난립하는 이른바 군벌시대라는 지옥도가 펼쳐지게 된다.

한국사의 시선으로 보면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에 주재하며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횡포를 부린 오만한 제국주의자로 악명이 높다.

목차

1.
1.1. 조선에서의 활동
1.2. 북양군벌의 수장
1.3. 황제
2. 평가
3. 트리비아
4. 영상

1.

1.1. 조선에서의 활동

허난성 샹청에서 태어났다. 벼슬길에 오른 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나라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오장경을 따라 조선에 파병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군란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스물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청나라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1884년 갑신정변 때도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해 개화파와 일본군을 몰아내고 정변을 진압했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 최고 실권자인 이홍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위안스카이는 1885년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2)라는 긴 이름의 벼슬을 받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

약 9년 동안 조선에 머물며 국왕인 고종을 무시하고 조선의 내정, 외교, 경제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말을 타고 궐내를 마음대로 활보하거나 고종에게 하대하는 등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여 조선인들의 큰 원성을 샀다.(3) 그러나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구실로 개입한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청나라로 귀국하면서 조선과의 악연은 끝이 났다.

1.2. 북양군벌의 수장

청일전쟁 패전 후 북양군의 군권을 얻었다. 1898년 무술변법 당시 개혁파였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를 믿고 있었지만,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이 계획을 서태후 측에 밀고(배신)해 버린다.(4) 이 공로로 그는 서태후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의 정점으로 승승장구했다. 서태후의 총애를 얻은 그는 서양식 신식 군대인 신건육군(新建陸軍)의 훈련을 맡게 된다. 뛰어난 수완과 인맥 관리로 이 군대를 사병화시켰는데, 이것이 훗날 중국 대륙을 뒤흔들 북양군벌(北洋軍閥)의 모태가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붕괴 위기에 처하자, 조정은 은거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진압을 맡겼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여기서 두 번째 대형 배신을 기획한다. 그는 혁명군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혁명군의 지도자인 쑨원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조건은 내가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킬 테니, 나에게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군사력이 부족했던 혁명파는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수락했고, 위안스카이는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로써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실권을 잡는 데 성공한다.

1.3. 황제

대총통 자리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민주주의나 공화제에는 1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뜯어고치며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심지어 1915년에는 일본이 내민 굴욕적인 21개조 요구를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덜컥 수락해 버리며 엄청난 비난을 샀다.

결국 권력욕의 끝을 달리던 그는 1915년 12월, 공화정을 폐지하고 국호를 중화제국,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고치며 스스로 황제(홍헌제)의 자리에 올랐다.(5)

하지만 이런 행동은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는 물론, 자신의 수족 같던 북양군벌 부하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타도하자는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위안스카이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버티다 못한 그는 불과 83일 만에 황제 제도를 취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요독증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6일 생을 마감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他害了我(그가 나를 망쳤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가 자신을 부추긴 장남 위안커딩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2. 평가

능력과 처세술은 높았으나 그것을 오직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는 데만 사용했다. 민주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시대착오적인 제정을 부활시키려다 중국을 끝없는 내전(군벌 시대)의 수렁으로 몰아넣은 원흉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중국 양안 모두에게서 공화국의 반역자, 매국노(21개조 요구 수락)로 일치단결하여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몇 안 되는 인물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조선 국왕을 능멸하고 갑신정변 등 조선의 근대화 시도를 무력으로 짓밟은 밉상 중의 밉상이기도 하다.

3. 트리비아

조선에 주재하던 시절, 여러 조선 여인들을 첩으로 들였다. 그의 수많은 자녀 중 절반 가까이가 조선인 첩의 소생으로, 대표적으로 차남 위안커원의 어머니가 조선인 김씨였다.

그가 대총통 시절 발행한 은화에는 위안스카이의 거대한 옆모습이 새겨져 있었는데, 민간에서는 이를 원대두(袁大頭, 머리 큰 원씨)라고 불렀다. 역설적이게도 이 은화는 질이 꽤 좋아서 군벌 시대 내내 중국 전역에서 가장 신뢰받는 기축 통화로 쓰였다.

4. 영상

(1) 袁世凯, 원세개
(2) 줄여서 교섭통상대신이라고 부른다. 사실상 청나라의 조선 총독 역할을 했던 직책이다.
(3) 훗날 일본 제국의 조선총독부 총독들이 했던 짓을 청나라 소속으로 20년 먼저 한 셈이다.
(4) 이 배신으로 무술변법은 10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광서제는 유폐되었으며 수많은 개혁파가 처형당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역사적 대형 배신이다.
(5) 주변의 아부꾼들과 장남 위안커딩이 "백성들이 황제 폐하를 원합니다!"라며 가짜 신문까지 만들어 속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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