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당시 청나라 조정을 배신하고 쑨원과 타협하여 중화민국의 초대 대총통 자리에 올랐으나, 민주 공화제를 짓밟고 중화제국을 선포하여 스스로 황제(홍헌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전국적인 반발에 부딪혀 불과 몇 달 만에 제정을 취소하고 화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 중국은 각지의 군벌들이 난립하는 이른바 군벌시대라는 지옥도가 펼쳐지게 된다.
한국사의 시선으로 보면 임오군란부터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에 주재하며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횡포를 부린 오만한 제국주의자로 악명이 높다.
허난성 샹청에서 태어났다. 벼슬길에 오른 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나라 군대의 지휘관이었던 오장경을 따라 조선에 파병되며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그는 군란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청나라로 압송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스물세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청나라 조정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후 1884년 갑신정변 때도 신속하게 군대를 동원해 개화파와 일본군을 몰아내고 정변을 진압했다. 이를 계기로 청나라 최고 실권자인 이홍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은 위안스카이는 1885년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2)라는 긴 이름의 벼슬을 받고 조선에 파견되었다. #
약 9년 동안 조선에 머물며 국왕인 고종을 무시하고 조선의 내정, 외교, 경제에 사사건건 간섭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말을 타고 궐내를 마음대로 활보하거나 고종에게 하대하는 등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여 조선인들의 큰 원성을 샀다.(3) 그러나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구실로 개입한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청나라로 귀국하면서 조선과의 악연은 끝이 났다.
청일전쟁 패전 후 북양군의 군권을 얻었다. 1898년 무술변법 당시 개혁파였던 광서제는 위안스카이를 믿고 있었지만, 위안스카이는 오히려 이 계획을 서태후 측에 밀고(배신)해 버린다.(4) 이 공로로 그는 서태후의 총애를 받으며 권력의 정점으로 승승장구했다. 서태후의 총애를 얻은 그는 서양식 신식 군대인 신건육군(新建陸軍)의 훈련을 맡게 된다. 뛰어난 수완과 인맥 관리로 이 군대를 사병화시켰는데, 이것이 훗날 중국 대륙을 뒤흔들 북양군벌(北洋軍閥)의 모태가 된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여 청나라가 붕괴 위기에 처하자, 조정은 은거하고 있던 위안스카이에게 진압을 맡겼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여기서 두 번째 대형 배신을 기획한다. 그는 혁명군을 공격하는 척하면서 뒤로는 혁명군의 지도자인 쑨원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조건은 내가 청나라 황제를 퇴위시킬 테니, 나에게 중화민국 대총통 자리를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군사력이 부족했던 혁명파는 어쩔 수 없이 이 제안을 수락했고, 위안스카이는 1912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푸이)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이로써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실권을 잡는 데 성공한다.
대총통 자리에 오른 위안스카이는 민주주의나 공화제에는 1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뜯어고치며 독재 체제를 구축했다. 심지어 1915년에는 일본이 내민 굴욕적인 21개조 요구를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덜컥 수락해 버리며 엄청난 비난을 샀다.
결국 권력욕의 끝을 달리던 그는 1915년 12월, 공화정을 폐지하고 국호를 중화제국, 연호를 홍헌(洪憲)으로 고치며 스스로 황제(홍헌제)의 자리에 올랐다.(5)
하지만 이런 행동은 쑨원을 비롯한 혁명파는 물론, 자신의 수족 같던 북양군벌 부하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전국 각지에서 그를 타도하자는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위안스카이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버티다 못한 그는 불과 83일 만에 황제 제도를 취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실의에 빠진 그는 요독증이 악화되어 1916년 6월 6일 생을 마감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他害了我(그가 나를 망쳤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그가 자신을 부추긴 장남 위안커딩인지, 아니면 다른 누구인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1) 袁世凯, 원세개(2) 줄여서 교섭통상대신이라고 부른다. 사실상 청나라의 조선 총독 역할을 했던 직책이다.(3) 훗날 일본 제국의 조선총독부 총독들이 했던 짓을 청나라 소속으로 20년 먼저 한 셈이다.(4) 이 배신으로 무술변법은 10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갔고, 광서제는 유폐되었으며 수많은 개혁파가 처형당했다. 이것이 그의 첫 번째 역사적 대형 배신이다.(5) 주변의 아부꾼들과 장남 위안커딩이 "백성들이 황제 폐하를 원합니다!"라며 가짜 신문까지 만들어 속였다는 일화가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