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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최근 수정 시각 : 2025-11-05 00:03:13 | 조회수 : 20

1996년 K리그에 있었던 연고지 조정 정책. 서울을 공동 연고지로 바꾸고, 그 옆의 위성 도시에 축구팀을 유치하도록 하는 정책이었다.

목차

1. 진행
1.1. J리그 벤치마킹
1.2. K리그 상황
1.3. 3팀의 반발
2. 연고 이전 후
3. 결과
4. 영상

1. 진행

1.1. J리그 벤치마킹

정책의 벤치마킹은 1993년 갓 출범한 일본의 J리그가 추진했던 도쿄 공동화 정책이었다. J리그는 출범 당시 일본프로야구의 압도적인 인기, 특히 도쿄를 장악하고 있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인기를 절대로 넘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J리그는 야구팀이 없는 중소 도시에 연고지를 우선적으로 점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도쿄는 J리그 전체의 공동 연고지로 설정되었으며, 도쿄의 국립 요요기 경기장을 비워두고 J리그 팀들이 돌아가면서 경기를 개최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는 한국의 V-리그(프로 배구)에서 과거 시행되었던 5라운드 서울 중립경기 개최 방식과 유사한 맥락이다.

다만 엄밀히 말하자면 요요기 경기장을 제외한 다른 도쿄의 경기장에서는 팀 설립이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수년 간 도쿄를 연고로 하는 팀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중소 도시 위주의 연고 정책은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어 J리그는 프로야구 못지않은 인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도쿄에도 팀이 창단되어 현재는 도쿄에서도 축구 경기를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1.2. K리그 상황

당시 K리그는 서울에 3팀, 경상도에 3팀, 전라도에 2팀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는 서울 연고팀들이었다. 이들 팀은 연고 의식이 극도로 희박하여 사실상 연고지가 없는 떠돌이 팀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으로 당시 서울에 존재했던 LG 치타스의 경우, 전체 홈 경기의 절반 가까이를 타 지역 도시를 순회하며 치렀을 정도였으며, 당연히 흥행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이미 1980년대 리그 출범 당시부터 축구가 살 길은 연고 정착뿐이다라는 당위성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팀들에게 실질적인 연고 정착을 위한 정책을 펼치도록 전혀 지시하지 않았다. 그저 단발성 경품 제공 등을 통해 관중을 유치하려는 임시방편책에만 의존했을 뿐이다.(1) 결국, 연맹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J리그의 선례를 벤치마킹하는 형식으로, 서울 연고의 3팀에게 서울을 떠나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내 강제 이전을 추진하게 되었다.

1.3. 3팀의 반발

서울 연고의 3팀은 당연히 강하게 반발했다. 당시 서울은 인구 천만 명이 넘는 거대 도시였기에, 핵심 시장을 포기하라는 연맹의 지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정이었다.
  • 유공 코끼리(現 제주 유나이티드 FC): 기존 동대문운동장을 떠나 목동운동장을 홈 구장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우며 반발했다.
  • 일화 천마(現 성남 FC): 역시 동대문운동장 연고를 고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LG 치타스(現 FC 서울): 나머지 팀들이 떠나지 않는데 우리만 떠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서울 연고를 고집했다.
그러나 실상은 이들 세 팀 모두 공동화 정책 시행 1년 전부터 이미 다른 연고지를 모색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세 팀 모두 서울을 떠나게 된다. 한편, 이 시기에 새로 창단된 삼성의 구단이 수원에 정착하여 수원 삼성 블루윙스라는 이름으로 출범하면서, 서울은 공식적으로 K리그 팀이 없는 도시로 비게 되었다. 단, 당시 연맹은 구단이 자비로 경기장을 서울에 설립할 경우 서울 복귀를 허용한다는 단서 조항을 내걸기도 했다.

2. 연고 이전 후

서울을 떠난 세 팀, 즉 일화 천마, LG 치타스, 유공 코끼리는 각각 천안, 안양, 부천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새로운 연고지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 안양 LG: 안양 종합운동장은 1년이 넘는 대규모 보수 공사를 거친 후에야 겨우 홈 구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 부천 유공: 아예 전용 경기장이 없어 결국 목동 경기장을 5년 동안 빌려 쓰는 처지가 되었다.
  • 천안 일화: 홈 구장의 조명탑이 아예 없어 야간 경기가 거의 불가능했으며, 승부를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1990년대 프로 축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황당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 중 일부는 또다시 연고지를 옮기거나 다른 행보를 보였다.
  • 일화 천마
천안을 떠나 성남으로 다시 연고를 이전하고 성남 일화 천마라는 이름으로 리즈 시절을 누렸다. 하지만 모기업의 종교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비인기 구단 신세를 면치 못했고, 관중 동원은 안습의 극치를 달리며 결국 성남에서도 연고 정착에 실패했다. 이후 성남시가 구단을 인수하여 시민 구단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 유공 코끼리
모기업인 SK와의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면서, 구단은 부천 SK는 영원합니다라는 말로 팬들을 기만하다가 2006년 새 부천 유니폼까지 완성시킨 상태에서 제주도로 가서 제주 유나이티드 FC가 됐다.
  • LG 치타스
나름 연고 정착에 성공한 모습을 보였고, 수원 삼성 블루윙스와 지지대 더비라는 라이벌전을 형성하며 흥행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후 아예 팬들에게 마음이 떠난 듯, 경기 시작 5분 전에 경기를 취소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거나, 팬들을 상대로 하는 이벤트마저 전혀 진행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관중 동원 역시 부천에 이어 최악의 수준을 기록했다. 결국, 연맹에 75억 원(2)을 건네고 서울로 복귀를 강행하여 FC 서울이 됐다.

3. 결과

결과적으로 안양과 부천, 경기도의 두 도시는 자신이 사랑하는 프로 축구단을 모두 잃는 비극을 맞이했다. K리그의 흥행 부진을 해결하겠다고 J리그를 무리하게 따라 하려다가 결국 졸속 행정으로 처리해 버린 연맹의 책임이 크다. 현재 프로축구연맹은 과거의 정책을 태세 전환하여 서울에 4~5팀 정도 생겨도 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대가는 너무나 컸으며, K리그의 수도권 흥행 부진이라는 고질적인 문제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심각한 것은, K리그의 실패 사례를 간과한 채 후발 주자인 프로 농구(KBL)와 프로 배구(V-리그) 역시 이 정책을 그대로 따라 하려다가 결국 똑같은 결과를 맞이했다는 점이다. 결국 이들 리그는 기업명만 외치는 관행을 벗어나고자, 방송이나 미디어 노출 시 연고지를 강조해 달라는 의견에 따라 지역명 노출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자연스럽게 그 지역에 뿌리내린 프로 야구나 해외의 선진 스포츠 리그와 비교했을 때, 인위적인 연고 의식 정착 사이에는 분명한 벽이 존재하고 있다.

4.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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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프로야구(KBO)가 1982년 출범 당시부터 연고 의식이 확고했던 것과 대조된다. K리그는 ─ 현 시점에서도 일부 논란이 있듯이─ 연고 의식이 매우 희박했으며, 연고가 자리 잡은 이후에도 중립경기를 수시로 개최하는 등 지역 팬들에게 충실하지 못한 행보를 보였다. 프로야구팀 명칭에 굳이 지역명이 붙지 않는 이유 ─ 대부분이 연고지를 알고 있기에 ─ 와 비교해보면 K리그의 연고 미정착 실태가 더욱 두드러진다.
(2) 이 75억 원은 서울 월드컵 경기장 건축 비용의 단 0.3%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이로써 연맹이 당초 내걸었던 자비로 축구 경기장 건설 조항마저 사실상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