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 이후 구 체제의 옹호자들은 혁명적 자유주의에 대항하였다. 그들은 크게 봉건 사회의 원형을 유지하려는 왕당파와 신분제를 부분적으로 철폐와 입헌군주제의 주장하는 푀양파로 나뉘어졌다. 왕당파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François-René de Chateaubriand)의 저작과 그의 삶은 왕당파의 행동 방침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2)푀양의 잔당이 자코뱅 통치하에서 탄압을 당했을 때, 보수주의 정파는 재야 세력으로서 몽타뉴파에 대항하였으며, 이내 자유주의의 정치적 입장을 수용하는 동시에, 노예제 폐지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클리시 클럽을 조직하였다. 1794년 열월 반동에 의해 프랑스 혁명이 사실상 패배로 끝나자 이들은 부르주아 사회 형성기에 나타날 보수적인 자본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왕당파 전통을 이어받은 보수주의 정파는 자유 무역에 반대하였고, 자유주의가 인민의 도덕에 타락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이들은 구 체제의 신분제적 요소를 형성되고 있는 법치 국가의 양상과 일정하게 조화시키려고 했다.
(B)19세기 유럽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에 의해 독점자본주의 단계로 나아가자 보수주의의 양상은 독점 자본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한 대외 팽창을 옹호하면서도, 개인의 권리 신장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아갔다.
(B) 자본주의 성장에 따라 변방의 낙후 분자로 전락한 지역 영주는 농촌에서 소규모 정치 운동을 결성하여 부르주아 사회를 이루는 상부 구조의 요소에 맹목적으로 반대했는데, 이를 농촌 포퓰리즘이라고 하며, 포퓰리즘의 어원이 되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보수주의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보수주의가 사상적 일관성에 의한 정치 테제라기보단, 자본주의가 일정한 성장 국면에 다다랐을 때 새로운 단계에서 나타난 모순 양상을 인식하길 거부한 정치 운동이란 것을 인식할 수 있다. 보수주의는 새로운 모순 국면에 따른 새로운(부르주아적인 의미에서) 제도적 방법론을 도입하길 거부했으며, 이러한 전통은 현대에까지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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