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에게 수학하며 철저한 성리학적 소양을 길렀다. 1515년(중종 10년) 알성시 별시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공신 세력(훈구파)을 견제할 새로운 인재를 찾고 있었다. 이때 조광조가 중종의 눈에 띄었고, 그는 전무후무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조정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조광조는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속도로 다음과 같은 개혁을 밀어붙였다.
현량과 실시
소격서 폐지
향약 보급
위훈 삭제
이중 결정타는 위훈 삭제인데, 중종반정 때 공을 세우지도 않았으면서 공신 명단에 이름을 올린 가짜 공신들의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훈구파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행위였으므로, 훈구 세력이 조광조를 죽이기로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기묘사화가 일어나며 몰락하게 된다.
조광조는 유교 사상과 도덕적 정당성을 일관성 있게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관료로 재직하면서 도덕적 소양과 현인의 임명 등 유교적 가치를 고취했으나, 정작 경제, 국방, 외교와 같은 사회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특별히 정의된 바가 없었다. 즉, 도덕과 명분에는 집착했으나 현실적인 민생이나 부국강병에는 소홀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지나치게 원리원칙만 따지는 바람에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다.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현량과 실시도 그러하다. 자신의 세력을 늘리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고, 실제로 현량과로 뽑힌 인물들은 대부분 사림파 일색이었다.
결국 중종과 양반 사림 세력 양쪽의 공격을 받고 기묘사화로 사사되었다.(1) 정작 조광조 본인은 사약을 받으면서도 중종을 믿어 의심치 않아 명령서를 보여달라고 했다고 한다.(2) 죽기 직전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걱정했다는 내용의 절명시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