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영국은 중국과의 교역에서 큰 적자를 보고 있었다. 중국이 파는 차나 도자기, 비단은 영국 상류층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영국이 파는 모직물은 중국인들에게 잘 먹히지 않았기 때문. 영국 입장에서는 은이 중국으로 계속 유출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무역 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영국은 중국에게 마약인 아편을 팔기 시작한다. 아편은 순식간에 중국 사회로 퍼져나갔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아편에 중독되어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아편 중독이 심각해지자 청 조정은 임칙서를 시켜 아편을 뿌리뽑게한다. 임칙서는 아편을 서양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까지 모두 몰수한 후, 광저우 앞바다에 던져넣은 후 석회를 뿌려 처분한다. 그러고는 아편을 팔던 영국 상인들을 추방한다. 이 과정에서 약 2만 상자 이상의 아편이 폐기되었다.
영국 상인들은 영국 정부에게 징징거린다. “쟤네들이 우리 재산 훼손했어요 징징.” 영국 내에서도 아편 무역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과 전쟁 반대 여론이 있었으나 의회에서 근소한 차이로 대 중국 선전포고안을 통과되고 함대가 파견된다.
영국은 중국으로부터 홍콩을 할양받았다. 항구도 개항시켰고, 배상금도 받았다. 관세 협정이나 치외법권 같은 불평등 조항도 찔러넣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얻은 이득은 예상외로 적었다. 항구를 몇개를 열건 영국이 중국에 파는 물건은 여전히 안 팔렸기 때문이다. 중국의 자급자족적 경제 구조는 쉽게 변하지 않았고, 아편을 제외하면 영국이 내세울 만한 매력적인 상품이 딱히 없었던 탓도 크다. 결국 이것은 영국이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한편 중국에게 제1차 아편 전쟁의 패배는 단순히 영토 일부를 잃고 배상금을 문 것을 넘어, 이후 서구 열강에 의해 반식민지 상태로 전락하는 '굴욕의 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청나라의 무능과 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났으며, 이는 태평천국의 난을 비롯한 내부 반란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