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1938년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이 시기에 그의 대표작인 자화상, 새로운 길 등이 쓰였으며, 평생의 벗이자 동지인 강처중, 정병욱 등을 만났다. 졸업 기념으로 시집 발간을 계획했으나 스승인 이양하 교수의 권고로 뜻을 접고 친필 원고를 주변에 맡겼는데, 이것이 훗날 그의 시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릿쿄대학의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편입하였다.(1) 그러나 재학 중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항일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생활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 16일 사망하였다.(2) 윤영춘이 그의 시신을 수습했고, 그의 묘는 고향인 용정에 있다. 광복을 단 6개월 앞둔 시점이었기에 그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1) 도시샤 대학은 정지용 시인이 다녔던 곳이기도 하며, 현재도 교내에 두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2)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한다. 당시 수감자들에게 바닷물 주사 등 정체불명의 주사를 정기적으로 놓았다는 증언과 기록이 있어 생체실험설은 학계에서도 상당히 비중 있게 다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