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구치 히데요
野口英世 | Noguchi Hidey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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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876년 11월 9일, 일본 후쿠시마현
사망1928년 5월 21일 (향년 51세), 가나 아크라
직업의사, 세균학자
주요 이력록펠러 의학연구소 연구원
구(舊) 1,000엔 지폐 모델

일본의 세균학자이자 의사. 가난과 신체적 장애(1)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의학자가 되었다는 입지전적인 인물로 포장되어 일본 교과서와 위인전에 단골로 등장했다. 한국으로 치면 위인전 속의 헬렌 켈러나 에디슨 급의 위상을 가졌던 인물. 2004년부터 2024년까지 발행된 일본의 1,000엔 지폐의 모델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의학계와 역사학계의 검증을 거친 현재의 평가는 과대포장된 노력의 아이콘 혹은 학문적 성과보다 정치적/국민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영웅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실제로는 연구 데이터의 신빙성 문제, 비윤리적인 생체 실험, 그리고 막장스러운 사생활로 인해 비판받을 점이 차고 넘치는 인물이다.

목차

1.
1.1. 연구
2. 논란
2.1. 생체 실험
2.2. 탕진
2.3. 불효
3. 화폐 모델
4. 영상
5. 트리비아

1.

알려진 바로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어릴 적 화로에 넘어져(2) 왼손 손가락이 유착되는 화상을 입었고, 이를 비관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는 스토리가 있다. 그러나 화상 때문에 차별받았다는 본인의 주장과 달리, 실제로는 그의 재능을 아낀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모금 운동을 벌여 수술비를 대주었다. 즉,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재기는커녕 의사가 되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수술을 집도한 와타나베 카나에 박사를 동경해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의학원인 사이세이 가쿠샤에 입학 후 20살에 의사 면허를 취득한 것은 사실이다. 머리 하나는 비상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1.1. 연구

의사가 되었으나 손의 장애로 인해 환자를 진료하기 어렵자, 기초의학(세균학)으로 진로를 틀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록펠러 연구소에서 일하며 명성을 쌓았다. 이 과정에서 진행성 마비 환자의 뇌에서 매독균을 발견한 것은 그의 진짜 업적으로, 이로 인해 노벨생리학·의학상 후보에 여러 번 올랐다.

그러나 황열병 연구에서 황열병의 원인이 세균이라고 주장하며 백신까지 개발했다고 발표했으나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황열병은 바이러스가 원인이다. 당시 전자현미경이 없어 바이러스를 볼 수 없었다는 쉴드가 있긴 하지만.

결국 그는 아프리카 가나에서 연구 도중 황열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본인의 잘못된 가설 때문에 제대로 된 예방책을 세우지 못해 죽음을 자초했다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다. 현대에 와서는 그가 발견했다는 병원균과 관련 연구결과가 모두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이다.

2. 논란

2.1. 생체 실험

매독 연구 과정에서 루에틴 반응 검사라는 것을 개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피험자의 동의 없이, 혹은 불충분한 설명으로 매독균 추출물을 주사했다. 대상에는 고아원 아동이나 병원의 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동의를 받았다는 기록이 일부 있으나, 당시 의학적 지식이 없는 일반인이나 보호자에게 제대로 된 부작용을 고지했을 리 만무하다. 심지어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실험 때문에 부모들에게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3) 뉘른베르크 강령이 나오기 전이라 해도 당시 기준으로도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2.2. 탕진

돈 씀씀이가 매우 헤펐다. 유학 자금이나 연구비 명목으로 후원자들에게 받은 거금을 술, 도박, 유흥비로 순식간에 탕진했으며, 여러 사람들에게 당시로서 거금을 받았음에도 몇 달 만에 다 써버리고 다시 돈 좀 빌려달라고 손을 벌렸다. 결국 주변 지인들도 질려서 나중에는 돈을 빌려주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결혼식 지참금까지 유흥비로 탕진했다는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연구 스트레스를 푼다는 핑계라기엔 너무 막장이다.

2.3. 불효

어머니의 희생으로 의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 뒤 15년 동안이나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다. 문맹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삐뚤빼뚤한 글씨로 "빨리 돌아오라"고 쓴 편지는 일본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자료로 남아있지만, 정작 노구치 본인은 그 편지를 받고도 연구 핑계로 귀국을 차일피일 미뤘다. # 이후 죽기 직전에야 잠시 귀국했으나, 다시 아프리카로 떠났고 결국 타지에서 객사했다.

3. 화폐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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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일본 정부는 기존의 1000엔 지폐 모델이었던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키를 내리고 노구치 히데요를 선정했다. 선정 이유로 과학 기술 입국을 지향하는 일본의 이미지를 위해 이과 출신 위인이 필요했다는 것이 정설. 하지만 유카와 히데키 등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놔두고 왜 하필 업적 논란이 있는 노구치냐는 비판이 당시에도 거세게 일었다.

결국 2024년 7월 발행된 새 지폐부터는 일본 근대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기타자토 시바사부로(4)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20년 만에 화폐에서 퇴출당함으로써 그의 위상은 더욱 떨어지게 되었다.

4. 영상


5. 트리비아

  • 만화 닥터 노구찌 등을 통해 한국에도 어느정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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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왼손 화상
(2) 일본의 전통 가옥은 마루 한가운데에 화로가 있어서 이런 사고가 잦았다.
(3) 검사가 기소하지 않아 재판은 이뤄지지 않았다.
(4) 페스트균을 발견한 세균학의 거두. 노구치 히데요가 록펠러 연구소에 가기 전 잠시 몸담았던 전염병 연구소의 소장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