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金庾信 | Kim Yu-sin
출생595년 (진평왕 17년)
사망673년 8월 18일(1) (문무왕 13년)
지위대각간(大角干) → 태대각간(太大角干)
시호 흥무대왕(興武大王)(2)
가족증조부: 구형왕 (금관가야 마지막 왕)
여동생: 문명왕후 (태종 무열왕의 비)
매제: 태종 무열왕 (김춘추)

신라의 군인, 정치인. 신라의 삼국통일을 이끈 주역으로, 멸망한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이라는 출신 성분의 한계를 딛고 진골 귀족 편입을 넘어 신라 최고의 권력자에 올랐으며 삼국통일전쟁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고 나당전쟁에 참전하여 통일신라를 건국하는 데 일조하였다.

목차

1.
2. 비판
2.1. 반론
3. 영상

1.

젊은 시절 화랑으로 활동하며 낭비성 전투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유명한 일화로 기생 천관녀와의 로맨스와 말 목 자르기(…)가 있다. 이후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와 연대하여 정치적 동반자가 되었고, 여동생(문명왕후)도 시집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비담의 난을 진압한 뒤 삼국통일 전쟁에서 황산벌에서 계백을 격파하고 당나라군과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멸망시킨 뒤, 고령의 나이에도 총사령관으로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지휘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태종 무열왕 즉위 후엔 원로로 국정을 자문하며 나당 전쟁에도 참전했으나 전쟁 도중인 673년 향년 79세로 사망하였다.

2. 비판

역사적으로는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았으나, 현대(특히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비판적 시각, 실제 업적보다 능력이 과장되었다는 일명 김유신 거품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삼국통일전쟁의 각 국면을 보면
  • 백제멸망전: 5만 신라군을 이끌며 나당연합군으로 백제를 공격했으나, 압도적인 전력차(10:1 이상)에도 황산벌 전투에서 고전하는 등 큰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화랑(관창 등)을 특공대로 내보내 사기를 올리는 전근대적인 방식에 의존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 고구려 멸망전: 유명한 쌀 배달 작전을 제외하면 특별한 전공을 이뤄내지 못했고 후방에 머무르거나 정치적 조율에 치중했다는 지적이 있다. 중풍으로 추정되는 질병으로 평양성 공격 시에도 경주에서 머물렀다.
  • 나당전쟁: 장수로서 은퇴 상태였으며, 전쟁 도중인 673년에 사망하였다.
선덕여왕의 평가(3)일본에서의 평가(4)를 보면 유능한 지휘관이었음은 부정할 수 없으나, 외부 인물인 가르친링을 포함하여 김유신보다 신라의 영토 확장에 기여한 인물이 적지 않다 점을 보면 삼국통일의 주역이나 엄청난 명장으로 불리기엔 부족하다는 것이다.

2.1. 반론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당시의 상황과 김유신의 나이, 그리고 역할을 간과한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실제로 백제 멸망(660년) 당시 김유신의 나이는 66세였고, 고구려 멸망(668년) 때는 74세였다. 당시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전장에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인 초고령으로, 직접 전장에 나서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리다. 또한 그는 야전 사령관이 아니라 국가의 군권을 총괄하는 총사령관(대각간)이었다.

그리고 쌀 배달 작전은 험준한 지형과 혹한, 고구려군의 기습을 뚫고 성공시킨 고난도 미션이었다. 이를 성공시킨 덕분에 당나라군은 전멸을 면하고 철수할 수 있었다. 병법에서 보급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황산벌 전투 또한 계백의 저항이 거셌던 것은 사실이나, 김유신은 결국 사기 진작책(화랑의 희생)을 통해 전세를 뒤집고, 기일 내에 당나라군과 합류하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했다.

더군다나 삼국통일은 단순한 전투의 승리가 아니라 외교와 내정이 결합된 총력전이었다. 가야계 수장인 김유신이 신라 왕실과 결합하여 내부 결속을 다졌기에 전쟁 수행이 가능했다는 시각도 있다.

3. 영상

(1) 음력 7월 1일
(2) 한국사에서 신하로서 왕(王)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다.
(3) 《三國史記》 〈新羅本紀〉 '善德王', "國之存亡, 繫公一身…"
(4) 《家傳》上, "傳聞, 大唐有魏徵, 高麗有蓋金, 百濟有善仲, 新羅有庾淳, 各守一方, 名振萬里, 此皆當土俊傑, 智略過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