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8년 건국되어 1392년 조선이 건국될 때까지 존속한 한반도의 통일 왕조. 건국자는 태조 왕건이며 마지막 왕은 공양왕이다.
후삼국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민족의 재통일을 이룩한 국가로 흔히 불교 국가이자 귀족 중심의 국가로 요약되며, 현재 대한민국의 영문 국호인 Korea의 어원이 된 국가이기도 하다. 국제 무역항이었던 벽란도를 통해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드나들 정도로 개방적이고 다원적인 사회를 유지했으나, 후기로 갈수록 권문세족의 폐단과 끊임없는 외적의 침입(1)으로 인해 국력이 쇠하여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거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조선은 건국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전조(前朝)인 고려를 깎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철저한 유교 국가였던 조선의 입장에서 고려의 불교 중심 사회와 잦은 무신들의 반란, 그리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여성의 지위 등은 혼란스럽고 타락한 시대의 증거로 묘사되었다.(2)
근현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시각
반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 왕조의 무능에 실망했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고려를 매우 높게 평가했다. 이들은 고려가 보여준 끈질긴 대몽항쟁과 적극적인 북진 정책, 그리고 다원적이었던 사회 분위기를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조선이 까일수록 고려의 주가가 올라가는 기적의 반비례 관계
보편사적 시각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다원적인 사상(불교, 유교, 도교, 토속신앙)이 공존했던 포용성, 귀족 문화의 화려함(고려청자 등), 그리고 코리아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린 국제적 면모를 객관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다만 지배층의 지나친 수탈과 사회 모순을 해결하지 못해 무너진 한계점 역시 분명히 지적받는다.
1123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고려에 다녀온 후 남긴 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당시 고려인들의 복식 문화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해당 기록에 따르면, "그 옷은 모두 흰 모시로 만든 두루마기(袍)에 검은 두건(烏巾)을 쓰고 네 개의 띠를 둘렀으며, 오직 베의 정밀하고 거친 정도로만 신분을 구별했다. 관료나 귀족이 퇴근하여 사가에 있을 때도 이를 입었다"고 한다.(3)
또한 머리에 관이나 모자를 쓰지 않고 맨머리를 내놓고 다니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를 두고 서긍은 "머리를 드러내는 것을 죄수와 다를 바 없다며 부끄러워하여, 대나무로 죽관(竹冠)을 만들어 썼다"고 기록했다.(4) 가난한 뱃사공들조차 어떻게든 머리를 가리려고 대나무 모자라도 챙겨 썼다는 점에서 당시 사람들의 체면 중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1) 거란, 여진, 몽골, 홍건적, 왜구 등(2) 흔히 알려진 고려장 같은 왜곡된 이미지가 민간에 널리 퍼지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추측이 있다. 물론 고려장 자체는 역사적 근거가 없는 완벽한 허구이다.(3)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九 '農商' "其服, 皆以白紵爲袍, 烏巾四帶, 唯以布之精粗爲別. 國官貴人, 退食私家, 則亦服之."(4) 《宣和奉使高麗圖經》卷第十九 '舟人' "復耻露頭與罪囚無別, 故作竹冠以冠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