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가져온 문서/진보위키]] [[외부:https://pbs.twimg.com/media/CeTNYNvWsAAPnJ8?format=jpg&name=small|width=300]] 咸錫憲, 1901년 3월 13일 ~ 1989년 2월 4일 한국의 독립운동가, 사회운동가, 저술가, 언론인, 기독교 운동가다. 호는 씨알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비폭력 독립운동가로, 광복 이후에는 소련 군정과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운 비폭력 저항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또한 민중을 씨알이라는 고유한 용어로 정의한 씨알 사상의 창시자로, 1970년에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였던 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기도 했다. == 삶 == === 독립운동 === 평안북도 용천 출생. 고등학교까지 진학하여 다니다가 3.1운동에 참가하여 퇴학당하였다. 이후 서울에서 친척인 함석규 목사를 만나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24년 일본으로 유학하여 지내는 동안 무교회주의[* 교회에 다니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등을 주장한 기독교운동가 우치무라 간조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1928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오산학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1938년 창씨개명에 거부하면서 사임하였다. 1940년부터는 평안남도 송산에서 송산학원의 이사로 참여해 활동하다가 계우회 사건[* 송산학원의 전 주인인 김두혁이 항일운동을 하다 검거된 사건]에 연루되어 1년간 수감생활을 하다 1942년 초 풀려났다. 그런데 몇개월 안되어 1942년 5월에 성서조선 필화사건[* 성서조선은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등등 무교회주의를 따르는 총 6명이 창간한 동인지이다. 1942년 3월호 성서조선 권두언에 '얼어죽은 개구리를 애도함'이라는 글이 실렸는데, 일제는 얼어죽은 개구리가 조선을 빗댄 것이라며 성서조선을 폐간시키고 관련자를 체포하였다.]에 연루되어 1943년까지 미결수로 옥살이를 하였다. === 해방 이후 군정까지 === 해방 이후에 함석헌은 반공시위 신의주 학생운동 사건의 배후라며 소련 당국에 체포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후로도 감옥을 제 집 드나들듯 하다가 급기야는 시베리아에 귀양 갈지도 모르는 처지가 되어 1947년 월남하였다. 월남 이후 YMCA에서 성서강해를 하다가, 전후 1956년 부터 장준하 등의 천거로 잡지 사상계에 기고를 하면서 논객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 함석헌은 기독교계와 사회를 비판하면서 논쟁의 중심에 섰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관련자 훈장 서훈을 반대하는 글을 쓴 일로 잠시 투옥되기도 했다. 이승만 하야 후 군사정변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그의 비판적인 논조는 계속되었다. 1970년 4월, 그는 자신의 사상을 집대성한 월간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 체제 하에서 사상계가 폐간된 이후, 민주화 운동의 가장 중요한 언론 창구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함석헌은 유신 정권 내내 탄압의 중심에 섰고, [[10.26 사태]] 이후 서울의 봄도 잠시, [[전두환]]의 신군부가 집권하자 씨알의 소리는 1980년 강제 폐간당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 하에서도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1989년 2월 4일, 향년 87세로 타계했다. == 영상 == [youtube(A7F3laRY8qI)] [Include(틀:가져옴2, O=진보위키, C=[[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nc-sa/3.0/|CC BY-NC-SA 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