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 부대가 압록강을 건너 함경남도의 보천면을 습격해 교전했던 사건. 보천보 전투라고도 부르며, 관공서를 공격하고 격문 살포 등을 했다. 동아일보를 통해 크게 보도되면서 김일성의 유명세에 한 몫을 했으며, 덕분에 북한에선 보천보혁명박물관, 보천보전투승리기념탑 등을 지으며 성과(2) 에 비해 과장 및 우상화를 하고 있다.
1930년대 후반, 일제의 만주 지배가 공고해지면서 무장 투쟁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동북항일연군은 대원들의 사기를 높이고 국내 진공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국경 지대 습격을 계획한다. 당시 보천보는 일본군의 경계가 비교적 허술한 지역이었으며, 국경(압록강)과 인접해 있어 치고 빠지기에 용이했다.
1937년 6월 4일 밤 10시경, 김일성이 이끄는 약 90~200명의 유격대가 압록강을 도하했다. 이들은 보천보에 침투하여 경찰서, 우체국 등 주요 관공서를 공격하고 격문을 살포했다. 그 과정에서 민간인 2명(3)이 사망했다. 현금 4000엔과 물자 등을 노획한 뒤 철수하였다. 습격 후 다음 날이 밝자 일본 경찰 추격대가 뒤를 쫓았고, 추가 교전이 이뤄졌다.
이 사건의 가장 큰 의의는 심리적 효과였다. 당시 동아일보가 이 사건을 대서특필하면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북한의 지도자로 등극할 때 결정적인 명분이 되었다.
전술적으로는 소규모 습격에 불과했으나, 이에 격분한 조선총독부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혜산 지역의 항일 조직인 갑산공작위원회 회원 수백 명이 체포되는 이른바 혜산 사건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이 습격 때문에 국내에서 암약하던 독립운동 조직망이 뿌리째 뽑히는 괴멸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1) 당시 25세. 북한에서는 위대한 수령님의 신출귀몰한 전법으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유격대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2) 민간인 2명만 사망했을 뿐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이 습격 후 일본군의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대토벌로 수백명이 검거 및 기소되는 결과를 낳았다.(3) 요리사 1, 아이 1